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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이름 태희
ㆍ조회 4553
ㆍ작성일 2016-09-04 (일) 07:19
재일 민족교육 1세대 김용해 선생

재일 민족교육 1세대 김용해 선생

재일민족교육 "사람을 존중하며 살자는 교육이죠
"[허영선이 만난 '사람']재일 민족교육 1세대 김용해 선생

 '사람의 아픔을 아는 사람으로!' '본명으로 부르고 본명을 사용하자' 일본땅, 식민의 짙푸른 어둠을 건너온 민족인 만큼 당당하게 제 이름자 쓰자 했습니다. 오사카 소학교 강사 36년. 한결같이 민족의 긍지, 본명 쓰기 운동을 펼쳐온 1세대 민족교육의 선구자입니다. 민단 오사카 본부 교육정책의 기초 징검돌을 놓아온 재일제주인 1세. '김선생님!' 그렇게 부릅니다. 재일의 삶을 사는 동안 빛과 그늘의 세월이 들락날락하였고, 그동안 그의 품을 떠난 수많은 제자들이 '김선생님'을 그리워합니다. 퍽퍽했던 고향 땅 떠나 현해탄 건넌 제주시 '오도롱' 앳된 청춘, 이제 황혼. 한가위 앞둬 잠시 고향에 들렀습니다. 민족교육 대목에서 목청은 아직도 칼칼합니다. 강같은 세월, 어쩔 수 없으나 자꾸 풍화되는 재일 세대의 현실이 눈에 밟힙니다. 김선생님! 그를 만났습니다.

 # 민족의 자각과 긍지가 없으면 안되는 일

   
 
 

 재일 민족교육자 김용해 선생은

 1926년 제주시 이호동에서 태어나 1943년 도일. 재일본대한민국민단오사카지방본부 고문. 성동전문학교 경제과, 1953년 대판상업대학 경제학부 경제과 졸업. 1946년 안작조선소학교 교원 시작. 1951년부터 1986년까지 오사카시립 키타츠루하시초등학교(北鶴橋)에서 민족학급강사 36년. 한국 건양대학교 명예교수. 재일오사카 제주도민회 회장. 재일본대한민국민단대판부지방본부 사무국부국장 문교부장. 재일본대한민국민단오사카 지방본부 민족교육추진위원장 역임. 재일본제주도친목회장 역임. 광산김씨 친목회 활동. 제주도문화상 교육부문 수상(1995)·2001대판부교육위원회 표창·2005년 국민훈장 목련장. 저서로 「본명은 민족의 긍지」(제주에서도 번역), 「안유, 안창호, 안중근 약전」 「알아두어야할 제사」 등. 지난해 그의 삶을 반추한 「김선생님」(신간사)이 출간됐다.

 
 
어떤 제자는 그를 '인생의 미로'에서 반드시 등장하는 은사라했다던가. 기타츠루하시초등학교가 설립된 1951년엔 방과 후, 강당에서 420명의 아동을 혼자서 담당하기도 했던 이 노교육자. 그는 왜 그렇게 본명 쓰기 운동에 매달렸을까. "우리 조상들이 자랑으로 삼아온 성과 이름을 쓰며 살아야 한다. 잘못하면 다시 억압 당하게 된다는 기대와 희망이었죠. 그런 어려움을 이겨내지 않으면 자기는 없어요."

 아무리 시대가 바뀌어도 바래지 말아야할 것이 민족정신이며 자기의 뿌리란 얘기다. "일본 공립학교에서는 본명을 쓸 용기가 적어집니다. 때문에 우리 자신의 자각과 긍지가 없으면 안된다는 겁니다." 그러한 노력들로 이젠 일본에서 태어난 사람들도 한민족으로서 본명을 써야한다는 운동이 퍼지고 있단다.

 요즘들어 일본의 징병, 위안부문제 등 역사왜곡이 더 심해지고 있다고 개탄하는 이 민족교육자. "우린 교과서 편찬때마다 시정하라 항의합니다. 집필자들이 그런 글 쓰면 문부성에서 다 삭제해 버려요. 자민당 정권은 끄덕 안해요. 연령이 70, 80대들은 한국을 지배했다고 생각하니 너무도 완강한 겁니다. 물론 양심적인 학자들도 있어요. 독도문제, 중국의 센카쿠 문제 등 역사학자들을 모이게 하고 연구하게 한 사람들인데 그렇게 머리가 돌아갑니까. 역사를 사실대로 쓰지 않아요. 그러니까 초·중·고 교육이 더 필요한거죠."

 문제는 한국인으로 살거나. 편리를 위해 일본 사람으로 살거나. 이것은 주체성 문제란다. "가정교육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고, 일본 교육자들의 양심에 호소하고 투쟁해서 민족의 편견과 차별을 없애는 교육을 획득해야 한다는 겁니다. 때문에 관리직에 있는 교육 간부들을 교육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 한문 사장(師匠)이 희망이었던 아버지

 아버지는 제도 교육을 좋아하지 않았다. 부친의 소망은 오로지 아들이 한문 선생이 되는 거였다. 그것도 교사 전문가. 즉 '사장(師匠)'이 되는 것. 아버지의 집착 덕분에 천자문은 외고 쓸 수 있었지만, 「자치통감」은 이해할 수가 없었단다.

 "열 살에 어떻게 역사, 문학을 알 수 있겠습니까. 한문이란 읽고 외고 한시를 짓는 것. 좀더 알기쉬운 한문교육이 바람직하다는 생각한 적 있어요. 맹자왈, 의미해석 한다는 게 좀처럼 지식으로는 어렵죠." 일제 식민지하에 들어간 것도 주자학 같은 것 말고 실생활에 입각한 교육을 했다면 일본의 식민지는 안됐을거라고 본다는 이 원로 민족교육 1세대.

 "같은 연배 친구들은 학교에 갔죠.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어요. 밖거리에다 같은 이호리 김희야 선생을 초빙해 한문교육을 받았죠. 엄격하고, 열성적으로 교육했어요. 가끔 도망도 가고, 피하기도 했지만. 아버님에게 매도 많이 맞았어요. 다른 아버지는 이해가 깊어서 학교에 보내는데 왜 나만 괴롭히는가. 여덟살 아홉 살에 천자문을 시작해 의미를 전혀 몰라요. 공자왈 맹자왈 해봐야 이해될 연령 아니잖습니까." 이후 판포 선생 1년, 광령 선생 1년, 일곱 살부터 열두살까지 한문 독강 전전. 결국 그렇게 바라던 초등학교는 12살에야 1학년으로 입학할 수 있었다.

 # 군대환에 희망 품고 현해탄 건너 민족교육 강사

 군대환에 희망 싣고 현해탄을 건널 때는 열일곱. 도항의 결심은 40대 초반의 아버지가 세상을 뜬 후였다. 갑자기 생계를 떠맡게 된 어머닌 대개 밤 12시경이 되면 마당을 향해서 남모르게 울면서 한숨을 쉬고 있었다. 시집간 누나들 외에 남겨진 가족들. 그와 누이 둘, 동생 하나. "장자로서 내가 어머니를 도와야겠다 해서 밭에 가서 조도 베고, 검질도 메고, 감자 나르고 했죠. 아무리 해도 농가에 수입이란 게 없잖습니까. 닭을 키우는데 달걀을 팔아야 신도 옷도 사주는 형편이니까. 그것을 직시할 수가 없었어요. 마음이 아파서. 내가 부모님께 불효가 되더라고. 일본으로 가 돈을 벌어서 어머님께 송금을 해야겠다. 이게 결정적인 이유였어요."

 격동의 시대, 제주인들이 밀물처럼 현해탄 건너던 시기였다. 건너면 뭔가 세상이 달라질 것 같았다. 사촌형은 오사카에서 철강업 경영, 큰 매부도 일본에 있었다. 일본은 전시 상태. "공장 노동을 해서라도 어머님께 돈을 보내는 것, 공부를 해서 학문으로 출세를 하는 것 두가지 목적이 있었죠." 도일 2년 만에 해방. 일자리 없고. 취직도 안됐다. "편견과 차별 속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호주로서 역할을 해야겠다. 일단 귀국해야겠다. 결심이 섰습니다" 그때였다. 어머니로부터의 편지. 고향에 오지말라는.

 처음 취직한 곳은 신문사. 활판공에다 교정도 보는 일이 임무. 그때 고향 선배가 그를 불렀다. 자기학교에서 같이 일하자고. 안작 소학교였다. 교원 인생의 시작. 야간엔 전문대에 들어갔다. "아동수가 그리 많지 않아서 1, 2, 3학년 함께 복식수업을 했어요. 읽는 것, 쓰는 것, 말하는 것 중심교육이지요. 하여간 그것을 최우선 과제로 했습니다. 말을 알아야한다는 것 말이지요." 흥미도 있었고, 사명감도 싹트기 시작했다.

 그때 동포들의 고생은 말이 아니었던 것을 기억한다. "전부 야매 장사라 해서 담배를 말아가지고 시골에 팔아서 현금 만들고. 아니면 고무로 만든 장화신을 만들어서 농촌에 가서 팔아 쌀로 받아 갖고 오고. 도중에 역에 도착하면 경관들이 탁 서서 전부 몰수 당하는 상황이 되니까 생활이 안정이 됩니까. 거지 동냥질 마찬가집니다. 길바닥에 물건을 팔기도 하고, 우리 동포들이 국수를 만들어 자기도 먹고, 팔기도 하고. 그런 상황 하에서 있다가 4·3, 한국전쟁. 재차 일본으로 돌아와요. 재산도 없고. 취직도 안되고. 다시 돌아올 적엔 얼마나 생활이 괴로웠겠습니까." 해방이 됐으나 우리말 우리글을 배우지 못한 조선의 아이들이었다. 그들과의 맹렬한 민족교육이 시작됐다. 온갖 곡절이 닥쳤으나 와중에 야간대학을 나왔고, 민족 강사의 선두로 묵묵히 흔들림 없었다. 그가 직접 가르친 제자들만 2000여명.

 # 명절 때 조상에 대한 성찰 있어야 의미 있어

 그가 재일동포들을 위해 쓴 「알아두어야할 제사」는 인기서다. 관혼상제 가운데 지금까지 일본에 남아있는 관습은 제사뿐이란다. 결혼 의식 등 전통은 거의 풍화되어버렸다는 것.

 어째서 분향하는지, 모사그릇의 의미도 모르는 세대가 많다. 스무해 전까지는 일본 글로 된 책자가 없어 불편해 하는 가정들이 많았던 현실. "가정에서 가족이 돌아가시면 관혼상제 아는 사람 찾아가라고 하면 2세, 3세들이 저를 찾아와요. 지방, 축원 쓰는 법을 자꾸 묻길래 철필로 써 줬어요. 그러다 책자를 내달라는 청을 받아 책을 낸 거죠." 한문서당에서 배운 것이 기초가 됐다. 민단 각 처에서 재판을 요구해와 10쇄까지 찍었다. 

 명절? 예전에 비해 이젠 일본에서도 간소화하고 있다. "고인이 좋아하던 음식을 올리는 제물의 변화는 어쩔 수 없어요. 좋은 음식 대접이 제사 목적인데. 신성한 분위기가 많이 깨지고 있죠. 저는 술 한잔을 올려도 좋으니까 엄숙하고 부모를 추모하고 성찰하는 그런 환경과 분위기를 만들라고 합니다. 묵도 3분도 좋고. 일본에선 자기부모가 어찌해서 일본으로 건너왔는지. 어떻게해서 교육시켰는지, 이런 역사를 이야기하면서 제사를 지내는 집안도 있어요. 차별 많은 나라에서 살아가는 것을 연구하라고 말이지요."

고향에 몰아친 4·3의 광풍. 일본에서 들었다. 사촌형수와 잠시 일본에서 다니러왔던 매형이 피살당했다는. "고향 부모는 어떻게 됐나 걱정이 돼 오사카에서는 친족들이 모이게 됐어요. 돌아간 이에 대해서 영혼을 위안시키는 추도회라도 열자. 일정한 중심이 필요했어요. 그러면서 사람이 돌아가면 납골시켰다가 귀국할 때 갖고 가자해서 광산김씨 친목회도 만들어졌습니다."

 고향엔 거의 해마다 온다. 감귤묘목 실어나르던 1960년대 중반부터. 관서도민회 시초가 된 제주도 친목회의 발기인이기도 했던 김용해. 그의 가슴에 살아있는 그리운 사람은 먼저 떠난 동향 선배 김진근이다. "지금 제주대학 석좌교수로 있는 저와 이름이 같은 김용해 아버지 김진근씨는 관서지방에서는 가장 지도적 위치에 있었어요. 민단단장 본부서 했고, 건국학교 교장도 했던 훌륭한 분이지요. 결혼 있을땐 김진근씨가 주례하고 내가 집사했어요."

 결혼 주례만도 300명은 섰다는 김용해. "한국적을 지키며 살아오지만 한국정부가 이런 동포들에게 어떤 것을 해준 적이 있는가." 그들은 늘 사무치는 고향에 눈초리를 두나 이쪽에선 그러지 못했다.

 가난한 청춘시대를 흘려보냈다. 한때는 학교와 교육위원회, 보호자의 압력에 좌절감을 맛보기도 했다. 재일동포. 한국적으로 산다는 것은 많은 장애를 건너야 하는 일이었다. 그러면서 또랑또랑한 조선의 아이들 눈빛과 살아온 김선생님. 그는 얼마전 자신이 전생애 걸쳐 모은 민족교육 자료를 제주대 재일제주인센터에 기증했다.

 초가을 바람 설렁이는 고향땅에서 김선생님, 그러셨다. "가파른 언덕을 올라가거나 돌아가는 것을 손해 봤다고 생각하지 말아라."

 글·사진 허영선(시인/전 제민일보 편집부국장)/ysun6418@hanmail.net

허영선  ysun6418@hanmail.net


출처 : 제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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