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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광산김씨전설 홈 > 종사자료실 > 제주광산김씨전설

김명헌 참판
김명헌(金命獻) 참판(參判)은 조선조 숙종(肅宗) 때의 중문면(中文面) 중문리 사람이다.
인물이 좋고 학문이 뛰어나, 과거를 하려고 서울을 여러차례 출입하였다. 그러나 과거는 보논 족족 낙방(落榜)이었다.
김참판은 낙방을 거듭해도 결코 굴하지 않았다. 아홉 번 낙방하고 열 번째 과거를 봤을 때는 나이가 여든 한 살이었다.
팔순(八旬) 노인인 김참판은 창창한 젊은이들과 같이 시지(試紙)를 펼쳐 놓고 율시(律詩)를 써 내려갔다. 그 한 구절에 말하기를,
"身年은 九九요. 落榜은 三三이라."
나이 81세에 낙방은 9번이라는 글귀다.
이 시지를 받아 든 상시관(上試官)은 글귀를 죽 내려다 보고는 자리 밑에 따로 넣었다.
과거가 끝나자 상시관은 크게 탄식했다. 이 늙은 선비는 아홉 번이나 낙방했지만, 이 글 재주면 필시 매번 급제 했을 것이다. 아깝게도 매번 급제를 빼앗겼다는 것이다.
사실 김참판은 아홉 번 과거에 매번 급제를 했다. 그런데 중간에 오리(汚吏)들이 이름을 바꾸어 뇌물을 먹인 엉뚱한 사람에게 벼슬을 주어 버린 것이다. 상시관은 이번엔 그런 일이 없게하기 위해 그 자리에서 영수증을 써주었다. 김참판은 영수증을 받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게 갑인년이었다. 과거는 문제도 없이 급제였다. 그러나 김참판은 집에 돌아와 과로 때문이었는지 병을 앓아 누웠다. 병은 점점 무거워 갔다. 김참판은 세상을 떠나야 할 것임을 스스로 느꼈다. 일생 소원이던 과거 급제를 못하고 죽게 됨을 탄식하였다.
이듬해인 을묘(乙卯)년 2월 19일에 김참판은 숨을 거두었다. 관(棺)을 짜고 입관이 끝나자, 먼 문앞에 관원의 행차가 당도했다. 과거 급제의 창방(唱榜)이 도착한 것이다. 제주목사(濟州牧使)를 거쳐 대정현감(大靜縣監)이 김참판에게까지 전달하는 것이 이렇게 늦어진 것이었다. 창방이 도착하자, 가족은 물론 동네 사람들이 한 없이 서운해 했다.
과원은 영전(靈前)에 분향을 하고 교지(敎旨)를 관 위에 올려드렸다. 순간 관이 다르르 떨고 교지가 방바닥으로 떨어졌다고한다.

괴 범천총
범천총은 광산김씨로서 이름은 용우(用雨)다. 약 4백년 전 구좌면 한동리 '굴미왓'이라는 집터에서 살았다. 키가 8척 장신(長身)인데다 눈이 쌍동공(雙瞳孔)이어서 성을 내어 눈을 치켜 뜨면 마치 호랑이 눈 같아 건장한 사나이도 기절해 버렸다 한다. 한동리의 옛 이름은 '괴'요, 이 사람이 천총(千摠 벼슬을 했기 때문에, 출생지, 눈의 특징, 벼슬을 한데 묶어 '괴 범천총'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범천총의 눈은 과연 무서운 것이었다. 나는 새도 눈을 치켜뜨면 떨어진다. 그러니 범천총은 곡식을 널어 말릴 때 닭을 보는 일을 극히 조심하였다. 부인이 마당에 곡식을 널어 놓고 잘 보도록 하고 나가면 범천총은 종일 눈을 감고 지내야 했다. 틈만 있으면 닭들은 곡식을 먹으러 달려드니, 범천총은 집 안에 앉은채 눈을 딱 감고 막대기만 까닥까닥하며 '후어! 후어!'하고 쫓는 것이었다. 만일 눈을 번쩍 뜨고 '후어!'해 버리면 닭들은 그 자리에서 곧 죽어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어느 해 이 소식을 들은 제주목사(濟州牧使)는 아무런들 그럴 리가 있겠느냐고 했다. "눈을 뜨면 나는 새가 다 죽는다 하니 말이 되느냐, 범천총을 이리 대령해라." 범천총은 목사 앞에 와 뵙는데, 끓어앉아 눈을 지그시 감았다. "이놈, 너 눈이나 터서(뜨면) 이와기(이야기) 허라." "예, 눈을 트면(뜨면) 성주님이 놀래카(놀랄까) 허연(해서) 눈을 못 틉니다." "허어, 이놈! 벨소릴 다 허네, 터 봐라." 하도 뜨라고 하니, 범천총은 번쩍 뜰까 하다가, 그러다 혹시 무슨 일이 생길까 하여 천천히 반쯤 떴다. 그러자 목사는, "감게! 감게!" 하며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한다.
범천총의 처가는 성산면 난산리(蘭山里)였다. 당시 제주목사가 부임해 오면 순력(巡歷)하였다. 목사의 순력행차는 이만저만한 인원이 아니었다. 도로가 잘 뚫리지 않은 때였으므로 순력행차는 도로가 아닌, 밭의 지름길을 지나는 일이 많았다. 이 행차가 한 번 밭을 지나갔다 하면 밭의 작물은 완전히 운동장이 되어 버리곤 했었다.
어느날, 범천총이 처가에 갔더니, 장인이 '이제 순력이 온다는디, 금년 우리 밭농사는 다 허여 먹었저' 하며 크게 탄식하는 것이었다.
"염려 마십서, 저가 강(가서) 막읍주(막지요)."
범천총은 순력행차가 오는 장인의 밭 어귀에 가 앉아 기다렸다. 목사 행차가 풍악을 울리며 밭 가까이 이르자, 범천총은 '음흠!' 하고 기침을 크게 한 번 하고 눈을 치켜떠서 일행을 쏘아보았다. 그러자 기세가 등등하게 울려오던 행차가 이리저리 흩어지고 멀리로 돌아 지나갔다고 한다.
이 무렵에는 육지 도비상귀가 많이 다녔다. 도비상귀란, 육지에서 온 행상인으로 일용잡화를 가지고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파는 것이다.
어느 날 범천총네 집에 도비상귀가 들어왔다. "흥성(흥정) 허시오." 제법 건방진 투의 소리였다. 범천총은 방에 앉은 채 대답했다. "살 거 엇수다(없습니다)." 방문도 열지 않고 대답하는 품이 좀 건방지게 생각됐던지, 도비상귀는 더욱 거칠게 '흥성허오' 하고 소리 질렀다. 범천총은 화가 나서 '누구냐?' 하며 눈을 치켜 뜨고 문을 홱 열었다. 순간 도비상귀는 당장 기절하여 자빠져 버렸다. 잠시 후 정신을 차린 도비상귀는 겁이 나서 바깥으로 내닫는데 대변이 보고 싶어졌다. 겁똥이 나오는 것이다. 급한 김에 도비상귀는 범천총네 집에서 조금 떨어지자, 한숨을 내쉬며 길가에 앉아 똥을 누었다. 범천총네 집에서 한길로 나오는 길목에는 쐐기풀이 무성해 있었다. 쐐기풀이란, 손으로 잡으면 마치 벌이 쏘는 것처럼 쏘는 풀이다. 도비상귀는 변을 다 보자 닦을 것이 없으므로 쐐기 풀을 한 줌 뜯어 뒤를 닦았다. 항문이 매우 아팠다. "에끼, 제주 놈 독허단 말만 들었더니, 풀까지 되게 독허구나." 하며 허리띠를 졸라매었다 한다.
한동리는 법천총 때문에 덕도 많이 보았지만 손해도 본 셈이다.
당시나 지금이나 한동리와 이웃 마을 행원리(杏源里)의 경계 바다에선 해조류가 많이 났다. 그러나 당시는 이 해조를 잘 거두어 들이지 못했기 때문에 바다의 수입이 별로 없었다. 그런데 바다는 고마운 것이 못 될 정도가 아니라 귀찮은 것일때가 많았다. 당시는 배라고는 커야 풍선이요, 따라서 파선이 되어 어부가 죽는 일이 다반사였다. 죽은 시체는 며칠 없이 바닷가에 떠올라 오는 것이다. 그 시체를 거두어 매장하는 일은 그 바다를 소유하고 있는 마을의 책임이었다. 이 일은 귀찮은 일 중에도 귀찮은 일이었다.
당시 행원리에 가까운 한동리 바다에 '쇠 죽으니'라는 바다가 있었다. 이 바다는 꽤 넓어서 바람만 불었다 하면 시체가 몇 구씩 떠올라 왔다. 한동리 사람들은 이 시체를 치우는 것이 고역이었다. 범천총은 이것을 해결하고자 했다. 하루는 행원 사람들을 불러다 놓고는
"일로 이렌(여기로부터 여기는) 너네덜(너희들) 바당이니(바다이니) 끊어 앗아라(가져라)."
하고 억지로 떼어 맡겼다. 세력에 몰려서 행원 사람들은 말 한마디 못하고, 바다를 맡아 시체를 치우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쇠죽으니' 바다는 행원 바다가 되어 버렸는데, 오늘날은 여기의 해조류 수입만도 몇 백만운이 된다. 행원리 사람들은 정말 전화위복(轉禍爲福)인 것이다.
범천총은 귀신과도 말을 했던 사람이다.
당시 조천면 함덕리에는 큰 당(神堂)이 있었다. 이 당은 神이 세어서 그 앞을 지날 때는 누구나 말에서 내려 걸어야 했다. 만일 그대로 지나다가는 말 발이 저절로 절게 되어 더 가지 못하였다 한다.  어느 날 범천총은 이 당 앞을 지나다가 말에서 내려 가도록 권고를 받았다. 범천총은 '장부 행차에 그럴 리가 있겠느냐?' 하고 말에 채찍을 놓아 그대로 달렸다. 이상하게도 금방 말발이 절름 절름하고 절더니 더 가지 못하였다. 범천총은 심히 고약스럽게 생각했다. 곧 동네에 들러서 그 당의 매인 심방을 불러들이라 했다.
"너가 이 당을 매었느냐(이 당을 맡아 제의를 전담하고 있는냐)?"
"예 매어 있수다."
"이 당에 귀신이 있으냐?"
"예 틀림없이 귀신이 있수다."  
"그러면 내 돈을 줄 테이까 곧 촐려서 굿을 쳐라. 굿을 쳐서 저 백맷기(큰 굿을 할 때 세우는 기)를 일어 세우민 귀신이 있는거고, 못 일어 세우민 귀신이 없는 거다."
굿이 시작되었다. 한참 굿이 고조되어 가니 깃대가 석자 가량 달달 떨며 일어서 가다가는 푹 쓰러지건 하는 것이었다.
"예끼! 어느게 귀신이냐. 귀신이 없는 거다."
범천총은 곧 장작을 모아 오라고 해서 당을 불질러 버렸다. 그러고는 성 안(제주시내)에 가서 볼일 다 보고 밤에 한동리로 돌아오고 있었다.
밤은 깊어 자정이 가까웠다. 구좌면 김녕리 사굴(蛇窟)앞쯤에 오고보니, 어떤 부인이 바구니를 옆에 끼고 앞에서 걸어가는게 보였다. '어떤 부인이 이 깊은 밤중에 길을 가는고?' 이렇게 생각하며 말에 채찍을 놓았다. 말을 달려 봐도 부인은 여전히 그 만큼의 거리를 유지하여 앞에서 걸어가는 것이다. 아무리 달려 봐도 부인을 미칠 수가 없었다.
그제야, 범천총은 '저것은 사람이 아니려니'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동리를 거의 가니, 부인은 숨을 내쉬며 돌위에 앉는 것이었다. 범천총도 말에서 내리고,
"어디로 가는 부인이디 이 밤에 질행(여행)을 헙네까?"
"가는 질(길)이나 가지, 들을 것 엇수다."
부인은 자꾸 대답을 회피하는 것이었다. 범천총은 자꾸 다가서며 캐어 물었다.  그제야 부인은 '범천총네 집에 찾아가는 길이라'고 했다. 범천총은 다시 그 이유를 자꾸 캐어 물어 가니, 자기는 화덕진군(火德眞君)이라 했다.  며칠 전 함덕리의 당을 불질러 버리니, 당신(堂神)이 옥황상제에게 축수(祝手)를 하고, 옥황상제는 다시 나를 시켜 범천총네 집에 가 불을 놓으라 하기로 지금 가는 중이라는 것이다.  범천총은 그 자리에 꿇어 엎드리어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용서를 빌었다. 만일 어려우면 가구만이라도 밖으로 내어 놓게 해 주십사고 애원을 한 것이다.  그제야, 화덕진군은 머리를 끄덕였다.  범천총은 동네로 달려가며 '우리 집 가구를 내어달라'고 연방 소리를 쳤다. 동네 사람들이 꾸역꾸역 나오고, 범천총의 회치는 소리에 영문도 모르고 가구를 내어 놓았다.  문짝까지 다 뜯어내었다.  그래도 무슨 변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제야 범천총은 조금 마음이 가라앉았다.  화덕진군이 지금 불을 놓으러 오는 중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기다려 봐도 들어오는 사람도 없고 불도 나지 않았다.
초조히 기다리던 동네 사람들은 맥이 풀렸다.
"어느 거 화덕진군이라?"
모두들 심심하여져서 담배나 피우려고 쌈지를 꺼냈다.  누군가가 먼저 부싯돌을 한 전 착 갈기고 손끝에서 불이 번쩍했다.  이게 웬일인가? 순간 집 네 귀에는 불이 번쩍 달라붙었다.
삽시에 불길은 하늘에 오르고 범천총네 큰집 네 채가 순식간에 불길에 휩싸이는 것이었다.
이것을 본 동네 사람들은 불을 끄려고 달려들었다.  범천총은 가만히 앉은 채로, "불을 끼우지 말앙(끄지 말고) 놔 둬 주게." 하고 말리었다. 한다

지관 김귀천
약 3백여년 전, 광산 김씨댁에 귀천(貴泉)이란 사람이 있었다. 어릴 적부터 학문에 힘써 풍수에는 신안(神眼)이란 평이 자자했다.
김지관은 지차 아들이었다.  어느 해엔가 아버지 상을 만났다.  우선 임시 토롱을 해 놓았다.  그러나 형제간에 아무도 장사 걱정을 하는 눈치가 없었다.  형은 '동생이 유명한 지관이니 묏자리를 보아 놓겠지'하여 동생을 믿고, 또 동생은 '형님이 장자(長子)이니 걱정을 하고 있겠지'하여 서로 미루고 있는 것이었다.
이 눈치를 알아차린 형수가 하루는 남편더러 타일렀다.  "소상이 돌아와 가도 장사 걱정을 아니허니 어떤 일이우꽈?"  "아시(아우)가 큰 정시(地官)난 산털(묏자리를) 봐서 장사 지냅중(지냅시다고) 헐 테이주."
"거 무슨 말이우꽈?  무사 큰상제라고 헙니까?  큰상제가 먼저 아시안티라도 산털 봐도랭(봐 달라고) 허여삽주(해야지요)."  형은 부인 말이 옳다 생각하고 아우에게 가서 의논했다.
"아시 소상은 근당(임박)허는디, 장사를 어떵허여 보젠 허염서(어떻게 해 보려고 하는가)?"
"거(그것), 난 모르쿠다(모르겠습니다), 성님(형님)이 어떵(어덯게) 걱정허카분덴 허였주마(걱정할까보다고 했지요)."  형은 조금 섭섭했다. 같은 아버지의 자식인데, 신안이라고 이름 난 동생이 저렇게 무심히 앉아서 형에게만 떠 맡기는 것이 되었느냐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말을 시작하면 궂은 말도 나올 것 같고 꾹 참기로 했다.
"경허민(그러면) 아시가 언제 산털 봐 주주(봐 주게)?"
"경헙주(그럽시다), 성님(형님)봐 도렝 허민(봐 달라고 하면) 봅주,  산을 보젱 허민(보려고 하면) 지관안티 타는 말 안장에 맹지(명주) 바지저고릴 허영 입저사(해 입혀야) 헙네다."
차마 동생이 이렇게 이렇게까지 말할 줄은 몰랐다.  어이가 없어 더 말을 못하고 돌아와서 부인에게 자초지종을 이야기했다.  어디 자기도 자식인데, 묏자리를 봐 준다고 하여 타는 말에 안장을 차려 내놓고, 거기에다 명주 바지 저고리까지 해 입혀야 봐 주겠다는게 돼 먹었느냐고 투덜대었다.  그러면서 아무 데나 가서 감장(勘葬_해도 동생을 빌어 묏자리를 볼 수 없겠다고 하는 것이다.  형수는 아량이 있어 남편을 달랬다.  큰상주로서 부모의 장사 걱정은 당연히 해야 옳은 일이고, 아무리 동생이라도 큰 지관을 청하려면 그만한 대우를 하는 것은 당연하다면서 그대로 부탁을 하자고 했다.
형은 다시 마음을 돌려 동생에게 구산을 부탁했다.  구산 나갈 날짜가 약속되었다.
형은 동생을 청해다 쌀밥을 잘 해 먹이고, 명주 바지 저고리를 좋게 하여 입혀서, 좋은 말에 좋은 안장을 차려서 동생을 태웠다.  형이 그 말을 이끌고 갔다고 하니(차마 그렇게 까지야 했는지 몰라도) 어떻든 형이 극진히 동생을 모시고 들판으로 나선 것이다.
형제는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구좌면 지경의 '조노기'라 하는 곳에 가서 자리를 하나 골랐다.  "여기 좋수다.  이만 허민 아바님 감장 헐만 허우다."
"음, 경허민(그러면) 정열허게."
형이 정자리에 방위를 보아 무덤 자리를 정하라는 것이다.
"정열(正穴)은 못헙네다."
"어떵허연 말이라(어째서 말인가)?"
"정열제(정혈을 정하는 삯) 천량(냥)을 놔사 헙네다."
동생에게 명주 바지 저고리에다 타는 말에 안장까지 갖추어 바친 일도 기가 막히는데, 이제 삯을 천 냥이나 내라는 것이 아닌가, 실로 어처구니 없는 일이었다.  그뿐 아니라, 백 냥이며 몰라도 천 냥을 마련하려면 재산을 거의 팔아야 할 판이니, 설사 동생이 아니라도 해 낼 재간이 없는 노릇이다.
형은 탄식하며 돌아왔다.

"어디 산천 봐집데까?'
"산천은 봤주마는 장사는 못허는 거로고."
부인이 사정을 듣고는 '우리 집 밭문서가 천 냥은 될 것이니, 이 문서함을 가져다 드려서 정자리를 고르고 장사를 하자'고 타일렀다.
형은 매우 못마땅해 보였지만, 부인이 자꾸 타이르므로 재산 문서함을 들고 동생을 찾아갔다.  "아시, 돈 천 냥은 읏고(없고), 이 문서함을 가져 와시메(왔으니), 받아그네(받아서) 정열허여 주게."
"기영 헙서(그리 하십시오), 이레(이리) 가져옵서."
문서함을 받아서 궤 속에 들여 놓고 탁 잠근 후 '이제랑 나갑주'하는 것이다.
동생은 형과 같이 그 곳에 가 나침의(羅針儀)를 놓아 정자리를 정해 놓고, 다시 어려운 조건을 내거는 것이었다.
"성님, 이딘(여기는) 산을 쓰젱 허민(묘를 쓰려면) 주판관(州判官)을 헌관(獻官)허곡 쇠(소) 잡앙 희생허곡 비단 폐백허곡, 경허영(그렇게 해서) 산제(山神祭)를 지내어사 헙네다."
그게 말이 쉽지, 아무 때고 일반민이 주판관을 토신제 헌관으로 모신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꼭 주판관을 헌관으로 모셔야 한다 하니, 할 수 없이 다시 돈을 써 가며 겨우 주판관을 모셔 토신제를 지냈다.
드디어 장사가 끝났다.
"성님 큰상제는 산소를 직허여사(지켜야)허는 법이우다."
역군들이 내려오게 되자 동생은 형에게 이렇게 말하고는 다른 사람들과 같이 슬슬 내려와 버리는 것이었다.  형은 혼자 아버지 산소 앞에 앉았다.  날씨는 근래에 드문 추운 날씨인데 싸라기 눈이 좍좍 갈겨댄다.  곰곰이 생각하니 생각 할수록 형은 화가 났다.  같은 부모 자식인데, 제가 지관이노라 해서 명주 바지 저고리에 타는 말까지 받았지, 거기에다 품삯으로 재산까지 가져갔지, 소 잡고 비단 폐백을 차려서 토신제 지내는 것도 다 형에게 맡기지, 이럴 도리가 있는가 말이다.  그것까지도 좋다고 하자, 저녁에 산소를 지키는 것쯤이야 같은 부모의 자식으로서 응당 저도 같이 고생을 해야 할 것이 아닌가, 남의 일처럼해서 저만 슬슬 내려가고, 이 형만 이 밤중에 고생시키는 법이 어디 있는가 말이다.  참 기가 막힐 일이었다.  형은 이렇게 울분을 토하고 가라앉히고 하면서 밤을 지내노라니, 무정눈에 잠이 잠깐 찾아들었다.
어떤 백발 노인 셋이 백마를 타고 구종을 거느려서 으리으리 하게 저쪽 언덕에서 내려온다.
앞에 오던 노인이 턱 멈추면서, "아, 우리가 노는 자리에 웬 놈이 작폐를 했다!"
그러자 둘째 노인이 아버지 묘를 보다가 큰 소리를 지른다.
"에끼 괘씸하다, 이놈 꺼내어야 헙네다."
심상치 않은 표정들이었다.  그런데 셋째 노인이 이를 말리는 것이었다.
"거(그것) 못헙네다.  저 주판관, 토지관(土地官)놈이 돈 천 냥을 받아 풀아 먹었으니 법이 읏어 못헙네다.  우리 자릴 옮깁주(옮깁시다)."
이렇게 서로 의논을 하다가 자리를 옮겨가 버렸다.  그 땅은 삼신선(三神仙)이 밤마다 내려와서 노는 자리였다.  동생인 김지관은 이를 알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 땅을 차지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에 형에게 그리 혹독히 군 것이다.
형은 아직도 그것을 모르고, 그저 '묘한 꿈도 다 있다.'고만 생각하며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아침이 되자 동생이 조반을 들고 올라왔다.
"성님, 간 밤에 무슨 꿈이나 읏입데까? "
"무슨 꿈 말이고?  아무 꿈도 못 봐고(못 꿔지더군)."
화가 가라앉지 않은 형은 거친 소리로 짐짓 이렇게 대답했다.
"계건(그렇거든), 성님이랑 이십서(계십시오), 난 내려갔다가 또 오쿠다(오겠습니다)."
동생은 다시 저 혼자 내려가 버리려고 하는 것이었다.
형은 다시 혼자 고생할 생각을 하니 어이가 없어, 동생을 부르고 꿈 이야기를 했다.
"예, 그럴 거우다,  이젠 되어시니 내려걸읍서(내려 가십시다)."
형제가 나란히 집으로 왔다.  그제야 동생은 재산 문서함을 형에게 가져왔다.
"성님,  이 문서함 받읍서, 그 땅은 이처록(이처럼) 아니허민 지탱 못할 땅이였수다,  우리 아바님 자손이 근 만명은 될 테이닌 그보다 더 헌 디 이십네까?"
그 때에야 형은 동생의 성의와 지혜를 알고 손목을 잡으며 탄복했다고 한다.
세월이 흘러서 형제는 일흔 살이 가까웠다.  어느날, 형은 동생더러 '우리가 세상을 버릴 날도 멀지 않았는데, 신후지지(身後之地: 죽은 뒤 묻힐땅)라도 가르쳐 주지 않겠는가? 고 했다.  동생은 이미 다 생각해 두었다면서 형을 모시고 신후지지 구경을 나갔다.
먼저 표선면 지경 게여기오름이란 곳을 가르켰다.
"여기 어떵허우까(어떻습니까)?"
"참 좋다!"
또 구좌면 지경의 게여기마루라는 곳을 가서 가리켰다.
"여긴 어떵허우까?"
"참 좋다!"
"성님 마음에 있는 디 먼저 가집서,  성님 아니허는 디 저가 눕겠습네다."
형은 표선면 지경의 게여기오름에 눕겠다고 했다.
"계민(그러면) 난 게여기마루에 눕겠수다."
이렇게 땅이 정해지자, 이제는 땅에 대해 토평을 하자고 했다.
"예, 게여기오름 산 좋수다,  천 명 속발지지(速發之地)로 문과(文科)가 연출(演出) 허겠수다."
"여기는?"

"여기는 장원지지(壯元之地) 삼천명지지(三千名之地)우다."
형이 잡은 땅이 동생 김지관의 자리만 못한 것이다.  얼마 있자, 동생 김지관의 아들이 먼저 죽었다. 김지관은 자기가 누울 묏자리 곁에다 아들을 묻었다.
다시 몇 해가 지나자 장손이 죽었다.  김지관은 성산면 종달리 말산뫼에 묏자리를 보아 장사를 지내게 되었다.  장손이 죽었으니, 김지관은 굴건제복(屈巾祭服)하고 상장(喪杖)을 짚어 조객(弔客)을 맞아야 한다. 그때 나이 여든한 살, 팔순 노인이 장손 장사에 곡을 해 가니 조객들이 다 측은해했다.  김지관은 이름이 높았으므로 제주 삼읍(三邑)에서 조객이 구름같이 모여들었다.  그 조객마다 '이런 억울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 하며 위로를 하는 것이다.
김지관은 하관을 하여 개판을 턱 덮어 두고는 굴건제복을 훨훨 벗어 던지고 춤을 덩실덩실 추기 시작했다.  거기에다 노래까지 곁들였다.  여기 온 선비들이 나를 불쌍하다고들 하지만 나는 불쌍한 사람이 아니오,  내가 내 자손 삼천 명이야 소가 밟아도 끄덕하지 않을 것이오,  이런 내용의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었다는 것이다.
장손을 묻은 말뫼산은 과연 좋은 국세다.  산이긴 한데 오르고 보면 움푹 패어져, 마치 달팽이가 돌려 앉은 것처럼 사방에 청룡.백호가 감겼고, 물이 한 곳으로만 굽이 돌아 흘러 나간다. 좋은 곳에 장손을 묻었다고 한다.
이렇게 장손까지 좋은 땅에 묻어 놓고 김지관은 세상을 떠났다.  역시 이미 보아 놓은 신후지지에 감장을 한 것이다.
김지관의 자손은 증손에 7형제, 현손에 9형제, 이렇게 7형제로 꽃 번성하듯 벌어져 갔다. 그리고 현손에 명도 선생(明道先生)이 나고 이어 대대로 벼슬이 끊이지 않았다.
형의 자손은 먼저 문과에 급제 했으나, 김지관의 말대로 동생의 자손만큼 수(壽)로나 명성으로나 발복하지 못했다는 것이다.(현용준 著 "제주도 전설"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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